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자르 왕조 (문단 편집) == 문화 == 카자르 왕조가 아무리 썩어빠진 나라였다지만, 일단 페르시아를 하나로 통일하고 어느 정도 평화를 유지하기는 했던 덕분에 [[사파비 왕조]]의 멸망 이래 정체되어 있었던 페르시아 문화는 다시 한번 발전할 수 있었다. 카자르 왕조의 예술문화는 기본적으로 옛 사파비 왕조의 것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차이점이라면 근대화가 진행되고 유럽과의 교류가 크게 늘어나면서 유럽풍 화법이 도입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당대 유럽은 [[렘브란트]], [[루벤스]] 같은 대가들이 활동하는 [[사실주의]]의 시대였는데, 이런 화풍을 페르시아의 화가들이 그대로 영향받아 그림을 그렸다. 이 덕분에 카자르 왕조 시대의 그림들을 보면 이전 페르시아 미술품들보다 훨씬 사실적으로 묘사된 게 특징이다. 옛날까지만 해도 변두리 미술 취급받던 [[유화(미술)|유화]]가 인기를 끌었고 색깔을 깊고 풍부하게 사용하면서 미적 감각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릴 수 있었다. 사치를 즐겼던 카자르 왕조의 샤들은 개인의 초상화 그리기를 좋아했다. 특히 호화로운 궁정 생활과 엄격하고 세련된 예법을 선호했던 2대 샤 [[파트 알리 샤 카자르]]는 생전 수많은 초상화들을 그린 걸로 유명하다. 그의 무릎까지 내려올 정도로 기다란 수염과 깊게 표현된 눈, 길쭉한 팔다리를 묘사한 초상화가 가장 유명한데, 이전 페르시아 화풍에 비교해 훨씬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지만 샤의 우상화를 위하여 약간 오리엔탈리즘적인 색채를 집어넣은 게 특징이다. 마치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처럼 묘사해서 샤의 권위를 높이려 시도한 것이었다. 파트 알리 샤는 생전 유럽을 단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지만 스스로의 위엄을 자랑하기 위해 초상화를 그려 유럽에 보내는 걸 좋아했다. 유럽인들에게 보일 것이었으니 미화시켜서 그리는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후 [[나스레딘 샤 카자르]]부터는 아예 샤들이 유럽으로 직접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자연스레 초상화의 중요도가 떨어지며 그림에 대한 황실의 수요도 줄어들었다.] 샤 뿐만 아니라 다른 황족이나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술을 후원하는 것 빼곤 할일이 없던 귀족들이 막대한 자금을 예술계에 퍼부었고, 이는 페르시아 미술의 발전을 크게 촉진시키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DNII_RAS_01002-001.jpg|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n_Early_Painting_of_Fath_Ali_Shah.jpg|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_Painting_of_a_Qajar_Couple,_Iran,_19th_Century.jpg|height=300]]}}} || || '''{{{#fff 맨가슴을 드러낸 두 소녀들의 초상화}}}''' || '''{{{#fff [[파트 알리 샤 카자르|{{{#fff 파트 알리 샤 카자르}}}]]}}}''' || '''{{{#fff 귀족 소년소녀의 초상화[* 저 그림에 등장하는 것처럼 수염을 기르지 않고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젊은 남성을 따로 '무칸나(مُخَنَّث)'라고 부른다. [[동성애자]]와 일치하는 단어는 아니며 그저 욕망이 부족하거나 성별 구분이 어려운 남자들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카자르 왕조 미술에는 초반에 등장하다가 나중에는 '여성을 닮은 남성'이 아닌 '여성 그자체'에 집중하며 점점 등장 빈도가 줄어든다. ]}}}''' || 카자르 왕조 미술계는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였는데 특히 여성에 대한 묘사가 두드러진다. 600년대 [[이슬람]]이 [[사산 왕조]]를 멸망시킨 이래 페르시아 미술계는 여성에 대한 묘사가 많지 않았다. 여성이 감히 초상화를 그린다는 건 극히 불명예스러운 짓이었으며 여성은 미술에도 마음껏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여성들이 훨씬 자유로웠던 [[몽골]]이 페르시아를 침략하고, 튀르크계 혈통들이 권력을 장악하며 여성들에 대한 묘사도 한층 더 자유로워졌다. 특히 카자르 왕조 시대 들어 유럽 문화가 유입되며 여성들에 대한 묘사가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19세기 들어서는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표현한 그림들이 다수 등장하기 시작했고, 두 남녀가 서로 껴안고 있는 등 젊은 남녀 간의 사랑을 있는대로 묘사한 그림도 나타났다. 특히 카자르 왕조 후기에는 '''여성의 맨가슴을 그대로 드러낸''' 그림마저 그려졌는데, 이는 일반적인 현대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로 당대 카자르 왕조의 사회적 분위기가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었음을 암시한다. [[나스레딘 샤 카자르]]는 [[사진]]을 사랑했다. 그는 최초의 페르시아인 사진가들 중 하나였고 처음으로 여성을 찍은 페르시아 사진가이기도 했다. 사진술에 반해버린 샤가 이리저리 사진들을 찍다가 자신의 [[하렘]] 후궁들을 찍었던 것이다.[*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이에 반발했지만 이미 사진술에 심취해있던 샤는 그냥 무시했다.] 그는 자신의 사진을 직접 찍는 것도 좋아했고 시종들에게도 사진 찍는 법을 베울 것을 장려했다. 처음에는 돈이 많은 귀족층들만, 그리고 남성들만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유럽인들의 유입이 늘어나면서 상대적으로 일반인들과 여성들의 사진 찍는 빈도가 증가했다. 예전에는 가족사진에도 오직 아버지와 아들만 나오는 수준이었다면 나중에는 어머니와 딸들도 모두 등장했다. 이후 여성들의 사회 진출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며 1900년대 [[테헤란]]에 여학교가 세워졌고, 1909년 사진술을 교과목으로 채택하면서 사진술은 페르시아 사회 곳곳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파일:1920px-Khalvat-karimkhani-panorama.jpg]]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Nasir-ol-Molk_Mosque_(inside).jpg|width=25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800px-In_Celebration_of_Colors_at_Nasir_ol-Mulk_Mosque_Shiraz_Iran.jpg|width=4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800px-Mezquita_de_Nasirolmolk,_Shiraz,_Irán,_2016-09-24,_DD_57-59_HDR_(cropped).jpg|width=266]]}}} || [[파일:Pouria_-_(64)_(cropped).jpg]] [* 맨 위 사진은 골레스탄 궁전의 정원, 두번째와 세번째 줄의 사진은 나시르 울물크 모스크다. 골레스탄 궁전의 정원의 경우 나스레딘 샤가 생전 가장 좋아하던 장소로, 이 곳에서 조용히 물담배를 피우며 사색하기를 즐겼다.] 우아함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페르시아 건축 역시 카자르 왕조 시대에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카자르 왕조의 정궁이었던 '골레스탄 궁전'이다. 원래 사파비 왕조 시절에 처음 지어졌고 [[잔드 왕조]] 시기에 개조되었다가 카자르 왕조의 공식 왕궁으로 쓰였다. 현재의 모습은 1865년에 개건한 것으로, 카자르 왕조 시대의 페르시아 건축미를 여실없이 드러내는 아름다운 궁궐이다. 거울과 샹들리에 장식으로 유명한 '브릴리언트 홀', 서구식으로 지어진 '거울의 전당', 바닥에 모자이크가 깔린 '살람 홀', 골레스탄 궁전의 얼굴인 '태양의 전당' 등이 유명하며 하나같이 페르시아식 전통미와 서구식 건축술이 잘 어우러진 모습이다. 다만 [[팔라비 왕조]] 시대에 테헤란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몇 백년 된 유적 따위가 도시 확장을 방해하면 안된다'라는 이유로 궁전의 상당부분이 철거되어 나간 것은 아쉬운 부분. 400년된 궁전이 철거된 자리에는 50~60년대식의 현대식 빌딩들이 들어섰다. [[쉬라즈]]에 자리한 '나시르 올물크 모스크' 역시 유명하다. 1876년 쉬라즈의 토후에 의하여 건축이 시작되어 1888년에 완공된 이래 아직까지도 이슬람 모스크로 멀쩡히 쓰이고 있는 중이다. 이 곳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스테인드글라스라고 하면 중세 성당에 있는 것들만 유명하지만 사실 스테인드글라스가 가장 먼저 쓰인 곳은 7세기 경의 [[시리아]] 지방이었다. 페르시아 역시 이 영향을 받아 스테인드글라스를 모스크 건축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페르시아 스테인드글라스는 '오르시'라고 따로 부르며 나시르 올물크 모스크는 페르시아식 스테인드글라스 사용의 정점으로 꼽힌다. 서양식 스테인드글라스와의 차이라면 스테인드글라스를 이야기 전달의 목적으로 활용했던 서양과는 다르게, 빛을 [[알라]]의 상징으로 보았던 페르시아는 빛 그자체 주안점을 두었다는 것. 모스크의 오르시는 수 백개의 작은 유리조각들을 철틀에 박아서 만들었으며 천장과 바닥, 벽면까지 모두 빼곡한 장식들로 채워넣어 보기 어지러울 정도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